당신의 심장

 

 

채호기

 

 

 

돌은

눈으로

읽을 수 없는

당신

가슴에 빠뜨린

돌에 새긴

점자를 더듬어 읽어도

내용을 알 수 없는

손바닥에 감싸인

당신의 심장

읽지 않아도

두근거리는







채호기 시집 <손가락이 뜨겁다>(2009) 중에서





시선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듯 빠져들게 만든 시의 구조가 훌륭하다.
돌이 물 속으로 가라앉듯이
시선이 아래로 아래로 천천히 가라앉는다.
다른 사람 마음 속에 살게 하려했던 내 마음은
 그 사람 마음의 바닥에서 안녕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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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코는 당신 냄새를 맡는다

 채호기

당신으로부터 결별의 말을 듣고 난 뒤에도 나는
밤에는 잠자고 아침에는 깨어났다.
수영을 하면서 근육을 부드럽게 풀고
세 끼니를 거르지 않고 먹었다.
아무런 문제없이 회사 일을 처리했고
사람들을 만나 태연하게 웃고 얘기했다.
눈과 귀에 번갯불이 떨어져 불타올라도
내 시력과 청력은 지극히 정상이었다.
심장을 출발한 피는 발톱 밑의 미세 혈관까지 거침없이 돌아다녔고
창자와 위도 꼬이고, 막히고, 터지지 않고 제 역할을 다했다.
나는 죽고 싶었지만 어이없게도
사람들은 내 얼굴 세포에 번지는 곰팡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나 내 코는 당신의 냄새를 줄기차게 맡았고
내 눈은 되풀이되는 당신의 영상 때문에 붉게 상기되었다.
내 뇌의 주름 주름마다 당신은 더 깊이 새겨졌고
내 손은 물건을 들 때도 당신을 더듬거렸다.


당신은 한 여름에도 흰 눈을 두른 큰 산 처럼
어디에서나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음 지었다.
휴일마다 다른 지방으로 멀리멀리 도망갔지만
낯선 거리 하찮은 골목의 한낱 쓰레기통 속에서도
당신은 예전의 그 눈길로 나를 쳐다보았다.
내게 원치 않는 이별을 강요했듯이 당신은
당신에 대한 기억에다 나를 가둬놓고 홀로 떠나버렸다.

 

 <손가락이 뜨겁다> 채호기, 문학과 지성사(2009) 중에서

 

 


 사랑은 오래된 추억으로 남아 떠나지 않는다.

 주말에 무한도전을 보는데 이제는 '반품남'이 된 하하와 노홍철이 서로를 놀리는 장면이 나왔다. 하하가 노홍철에게 괜찮냐고 물어보자 노홍철이 아무렇지도 않다고,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하하가 한 말이 일품이었다.

 "지금은 괜찮지? 한달 후에 너 죽을 거야."

 장난조로 한 말이었지만, 정작으로 그 사람이 그리워지는 건 적어도 그 정도의 시간은 지난 후이다. 태연을 가장하기에는 너무 약해져 있을 때, 기억은 불쑥 찾아온다.

 

 p.s.
비가 오니 시도 읽고
허튼 소리도 하고... 뭐 그러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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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른살에 다룬 몇몇 작품과 노래를 알고 있다. 잠깐 서른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1. 시

 
서른, 잔치는 끝났다.


최영미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땐 동지여!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다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란 걸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출전 : 『서른, 잔치는 끝났다』(창작과 비평사, 1994)





2. 소설



『서른살의 강』(문학동네, 2003)
- 은희경 김소진 전경린 성석제 양순석 이병천 차현숙 박상우 윤효. 젊은 작가 9인의 서른 살 테마 소설집.



수록작품/ 작가

연미와 유미 / 은희경
갈매나무를 찾아서 / 김소진
새는 언제나 그곳에 있다 / 전경린
황금의 나날 / 성석제
서른일곱, 옥잠화 / 양순석
서른, 예수의 나이 / 이병천
서른의 강 / 차현숙
게임의 논리 / 박상우
삼십 세 / 윤호






3. 노래


서른 즈음에 - 원곡 : 김광석


(성시경 씨 버전으로 올려봤어요.)


그리고 최근엔 이 노래도 있다.
장윤주 - 29
 

 

 위에 제시한 작품들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한국에서는 서른살을 '끝',  '경계'로 다루어 왔다. 건너가기 싫은 강으로 비유하기도 했다. 29살의 12월 31일 24시, 그러니까 30살의 1월 1일 0시에 모든 이는 더이상 소년, 소녀가 될 수 없다고 일방통보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른살을 다룬 작품은 우울하고 쓸쓸하다. 박탈당한 것에 대한 허탈함이 어쩔 수 없이 드러난다.

 '서른'이 과연 많은 나이인가 생각해본다. 이제 인간은 꽤 오래 산다. 평균치가 그렇다. 그런데 유난히 '서른'에 철이 들어야한다고 강요하는 우리나라의 분위기가 참 이상하다. 다른 해와 똑같이 그저 한 살 더 먹는 것일 뿐인데, 거기에 무슨 의미를 그렇게 많이 부여하는가. 서른이면 인생이 끝날 듯이 절박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서른'이 되고 싶지 않다. 두려워한다. 


 이십대를 '청춘'이라고 말하고, 그 이후에는 '청춘이 끝났다'라고 말하는 것도 그렇다. 틀 안에 스스로 자신을 가둘 필요가 있을까? 서른 이후에도 얼마든지 젊은 마음으로 발랄하게, 멋지게 살 수 있다. 그건 마음가짐의 문제다. 그런데 우리는 서른에 과도한 무게를 부여한다. 서른이 되면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짓고, 단골 선술집의 구석자리에 앉아 먼 데를 바라보며 한숨이라도 쉬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강요된 무게는 폭력이다. '서른'을 무겁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가벼워지자. 


 아직 서른이 되려면 몇 년이 남았다. 나는 가볍게 서른이 되고 싶다. 다른 이들도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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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물


이병률

 

칼갈이 부부가 나타났다
남자가 한 번, 여자가 한 번 칼 갈라고 외치던 소리는
두어 번쯤 간절히 기다렸던 소리
칼갈이 부부를 불러 애써 갈 일도 없는 칼 하나를 내미는데
사내가 앞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두 사람이 들어서기엔 좁은 욕실 바닥에 나란히 앉아
칼을 갈다 멈추는 남편 손께로 물을 끼얹어주며
행여 손이라도 베일세라 시선을 떼지 않는 여인


서걱서걱 칼 가는 소리가 커피를 끓인다
칼을 갈고 나오는 부부에게 망설이던 커피를 권하자 아내 하는 소리
이 사람은 검은 물이라고 안 먹어요
그 소리에 커피를 물리고 꿀물을 내놓으니
이 사람 검은 색밖에 몰라 그런다며,
태어나 한 번도 다른 색깔을 본 적 없어 지긋지긋해한다며 남편 손에 꿀물을 쥐어준다
한 번도 검다고 생각한 적 없는 그것은 검었다
그들이 돌아가고 사내의 검은 어둠이 갈아 놓은 칼에 눈을 맞추는데


희다 못해 저절로 눈부신 칼날이
집 안 가득 떠다니는 지옥들마저 베어낼 것만 같다
불을 켜지 않았다
칼갈이 부부가 집에 다녀갔다

 

출전 :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시 2006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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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집


이병률


기억을 끌어다 놓았으니 산이 되겠지
바위산이 되겠지
여름과 가을 사이
그 산을 파내어 동굴을 만들고 기둥을 받쳐 깊숙한 움을 만들어
기억에게 중얼중얼 말을 걸다 보면 걸다 보면


시월과 십일월 사이
누구나 여기 들어와 살면 누구나 귀신인 것처럼 아늑하겠지
철새들은 동굴 입구를 지키고
집이 하나로는 영 좁고 모자란 나는
해가 밝으면 동굴을 파고 파고
그러면 기억은 자꾸자꾸 몰려와 따뜻해지겠지


그 집은 실뭉치 같기고 하고 모자 같기도 하며
어쩌면 심장 속 같기도 하여서
겁먹은 채로 손을 푹 하고 찔러넣으면
보드랍고 따스한 온기가 잡혀와 아찔해진 마음은
곧 남이 되겠다고 남이 되겠다고 돌처럼 굳기도 하겠지


그 집은 오래된 약속 같아
들여다보고 살고도 싶은 여전히 저 건너일 것이므로
비와 태양 사이
저녁과 초저녁 사이
빛이 들어 마을이 되겠지


그렇게 감옥에 갇혔으면 하고 생각한다
감옥에 갇혀 사전을 끌어안고 살거나
감옥에 갇혀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나 줄줄이 적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 기억하는 일 말고도
무슨 죄를 더 지을 것인가를 생각한다
성냥을 긋거나
부정을 저지르거나
거짓말이라도 해야 하는 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세상을 끊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또 태어나야 할 거라고 생각한다

 


출전 :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시 2008』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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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

장석주


세상에서 내가 본 것은 아픈 사람과 아프지 않은 사람들

살아 있는 것들의 끝없는 괴로움과

죽은 것들의 단단한 침묵들,

새벽 하늘에 떠가는 회색의 찢긴 구름 몇 장,

공복과 쓰린 위,

어느 날 찾아오는 죽음뿐이다.


 

말하라 붕붕거리는 추억이여.

왜 어떤 여자는 웃고,

어떤 여자는 울고 있는가.

왜 햇빛은 그렇게도 쏟아져내리고

흰 길 위에 검은 개는 어슬렁거리고 있는가.

구두 뒷굽은 왜 빨리 닳는가.

아무 말도 않고 끊는 전화는 왜 자주 걸려오는가.

왜 늙은 사람들은 배드민턴을 치고

공원의 비둘기떼들은 한꺼번에 공중으로 날아오르는가.



 

 시집 <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 (1991) 중에서




 기형도 시인의 죽음이 1989년이었고, 그 후 1991년에 나온 시집이다. 이 시집을 읽다보면 기형도 시인에 대한 시가 종종 눈에 띈다. 천재 시인의 죽음은 그의 시만큼이나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시집 전반이 쓸쓸하고 우울했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허무, 우울. 그래서 더 마음에 들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안재환 씨의 자살에 관련된 기사들을 보면서, 이 시가 떠올랐다. 그는 내가 즐겨듣던 MBC FM4U <타블로와 꿈꾸는 라디오>의 게스트였다. 일주일에 한 번씩 농담을 섞어가며 다른 사람의 고민 사연을 듣고 상담해주던 그였는데 정작 제몫의 삶의 무게가 더 컸던 것이다. 언젠가 그가 고민 상담을 하다가 이런 말을 했던 적이 있다. "요즘 같아선 제가 고민 상담을 요청하고 싶네요." 라고. 웃으며 흘려들었던 그 말의 무게를 너무 늦게 실감한다.


 그는 21일에도 <꿈꾸는 라디오>에 출연했었다. 다시 들어보니 생방송이었던 것 같다. 이날 그는 아내와 마지막 통화를 했고, 통화 후 마지막으로 집에 들러 아내를 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방송을 했고, 그리고 행적을 감췄다. 그 방송의 청취자들은 어쩌면 그의 마지막 모습을 함께했던 것이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라디오 홈페이지에는 그날의 사진이 남겨져있다. 평소에는 티셔츠에 편안한 차림으로 오던 그가 그날은 검은 양복을 입고 있다. 활짝 웃고 있다. 손가락에는 결혼 반지가 반짝인다. 슬프다. 모든 것이.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진출처 : http://www.imbc.com/broad/radio/fm4u/dream/photo/index.html





+

09월 10일 추가


꿈꾸라의 이모삼촌 고민상담소는 20일에 녹음해서 21일에 방송했다고 기사가 났네요.

자세한 기사는 이 쪽에.

http://isplus.joins.com/enter/star/200809/10/20080910102704780602010000020104000201040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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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9. 7. 20:35

주저앉다


딸년이 선물한 그다지 비싸지도 않은
새 원피스 한 벌에
소녀처럼 상기된 엄마의 표정은
문득 나의 죄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한때의 웃음을 주고
그보다 더 오랜 노역을 요구한다.

매일 무너지는 걸음으로 가슴을 허물고
혼자인 세상에서 차라리 스스로를 장사지내며
위태함을 감내하느라 당신이 가벼워질 때도

아무 것도 아니며 아무것도 아님을,
이렇게 큰 죄를,
여전히 믿지 않는 당신이 고맙고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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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시를 씁니다.
많은 사람이 시를 쓰지 않는 시대에
시를 쓰는 일을 업으로 하는 이는 얼마만큼 힘들까 생각하면서
그 몫을 나눠지는 것입니다.
잘 쓰지 못하지만
억장이 무너질 때,
몇 글자 적고나면 그래도 나아지는구나 싶어서,
적고 지우고 그러다보면 결과물이 나올 때도 있습니다.
만족은 먼 이야기고, 예술가도 아니지만
(스스로 종이와 연필의 낭비로 환경을 파괴하고 있다고 자책하지요.)
때로 자신의 평범함이 지긋지긋할 때
당신도 한 편의 시가 되어보세요.
그건 의외로 즐거울 지도 모르죠.



.....맥주에 약간 취한 밤, 부모님 생각을 하면 좀 울컥한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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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생버튼을 누르시면 재생됩니다.)



 임용 공고가 발표되고, 복잡한 마음에 라디오데이즈에 사연을 올렸는데 운좋게 방송이 되었습니다. 저번에 100일 방송때 짧게, 한 문장 방송됐던 건 있지만 실질적인 사연 소개는 처음이네요. 게다가, 또 우연히 그 시간에 깨어있었던 지라 바로 알았어요. 제 사연이 소개됐다는 걸. 자리에 누워있다가 벌떡 일어나 컴퓨터를 켰네요. 지인이 거의 매일 라디오데이즈 프로그램을 듣느라 깨어있거든요. 너무 기뻐서 당장 누군가와 말하고 싶은 마음 뿐이었어요.

 라디오에서 제 이름이 나오는 순간, 두 손을 맞잡고 가슴 졸이면서 들었답니다. 비록 꿈꾸라에서 사연 소개가 몇 번 되긴 했었지만, 오늘 소개된 글은 제 개인적인 꿈에 관한 거라서 더 긴장됐어요. 누군가 제 글을 읽는 건, 언제나 즐겁고도 부끄러운 일이거든요. 가끔 동균 DJ가 자기 노래를 틀고 부끄러워하는 것처럼요. 너무나 개인적인 사연과 시이지만, 성의있게 읽어주고 정성껏 코멘트해준 동균 DJ 감사합니다.
 
 제가 정성들여 넣은 단어, 표현상 고민했던 부분들을 정확히 짚어내서 더 놀랐어요. 글에 대해 평가할 자격이 없다고 하셨지만, 아니에요. 한마디 한마디 도움이 되었어요. 제가 고쳐쓰고 싶다고 생각했던 부분까지 짚어내셨네요. 거기다가 아마추어에 불과한 제 글을 갖고 싶다고까지 말해주어서 더더욱 감사합니다.


 오래도록 누군가가, "글을 써도 좋다"라고 말해주길 기다렸어요. 내가 지금 품은 꿈이 틀리지 않았다고 말해주길 기다렸어요. 고맙습니다. 조금 더 용기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정말 고맙습니다.



2008.08.05

오늘로 임용고시가 96일이 남았답니다.
노량진에서 지냈던 겨울이 문득 생각나네요.
임용고시 준비를 하느라 그곳에 있었던 적이 있거든요.

노량진의 손바닥만한 고시원에서, 써두었던 시를
다시 꺼내볼 때마다 가슴이 덜컹거려요.
세상엔 저보다 힘든 사람도  많겠지만,
여러번의 시험 낙방이 괴롭게만 느껴지네요.
글을 쓰고 싶은 꿈이 있는데,
힘든 길인 걸 알기 때문에.
제게 어느 정도의 재능과 가능성이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부모님께 말은 못하겠고 혼자 고민만 늘어가네요.

김윤아 솔로 앨범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신청합니다.
부디 힘내라고 말해주세요




노량진, 겨울

김상미

찬바람에 양 손이 무안하다.
춥다고 말해서는 안되니까,
입술을 한 번 깨문다.
혼자 쌓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살아있음이 생생하다.
날마다 조금의 용기를 쥐어짜 이를 닦고
희망을 부벼 얼굴을 씻는다.
하루 분량의 말을
가슴으로 삼키면서
안온한 찻잔의 온기에 감사한다.
도전하는 자의 얼굴이라고
늘 열정에 들떠있는 것은 아니다.
바람결,
물씬 수산시장 짠 내에
가슴이 휑 비어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
이날 스파이로 스튜디오에 오셨던 윤연주 님이 올려주신 후기 중에서


노량진 시 를 적어 주신 분의 사연을 읽기 전엔 범상치 않은 실력의 소유자 라며 칭찬도 해 주셨고, 토닥토닥 PD님은 마음이 짠하셨다고...
자체발광 DJ님:이 거 나 달라고 해야 겠다..(방송에서... 나줘~ 애교.. ^^* 완전 귀여우셨음)
토닥토닥 PD님: 왜? 곡 쓰게?
자체발광 DJ님: 아니.. 이런 거 가지고 있음 좋잖아.. 나 달라고 해야징~
사연 나가는 동안 정말 뭉클했어요.. 임고를 친 전적이 있어 완전 내 얘기 같아서 짠~했어요..
자체발광 DJ님: 이 분은 시를 많이 읽으시는 분일꺼야.. 단어가.. 이거 봐봐..
(한 단어 한 단어 짚으시며, 말씀하시는데 완전 귀여우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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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론

최영미


사랑이 올 때는 두 팔 벌려 안고
갈 때는 노래 하나 가슴속에 묻어놓을 것
추우면 몸을 최대한 웅크릴 것
남이 닦아논 길로만 다니되
수상한 곳엔 그림자도 비추지 말며
자신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지 말 것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은 아예 하지도 말고
확실한 쓸모가 없는 건 배우지 말고
특히 시는 절대로 읽지도 쓰지도 말 것
지나간 일은 모두 잊어버리되
엎질러진 물도 잘 추스려 훔치고
네 자신을 용서하듯 다른 이를 기꺼이 용서할 것
내일은 또 다른 시시한 해가 떠오르리라 믿으며
잘 보낸 하루가 그저 그렇게 보낸 십년 세월을
보상할 수도 있다고, 정말로 그렇게 믿을 것
그러나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인생은 짧고 하루는 길더라




=============================================================================================

 문득, 최영미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어쩌면 행복이라는 건, 엄청나게 지루하고 하품나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남이 닦아놓은 길로만 가고, 질문도 없고,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아서도 안되고, 아무것도 배우지도 않는, 시를 쓰지도 읽지도 않는, 지난 일은 모두 잊고, 내일은 또 다른 시시한 해가 떠오르리라고 믿는 것'은 누가 보기에도 확실히 이상하다. 행복은 저렇게 이상한 것이었던가 싶어서 생각이 헝클어진다.

"행복"이라는 단어를 잠시 머리속에 담아본다. 행복하고 싶다. 그러나 나는 절대 저렇게 살고 싶지 않다.


 하지만, 저렇게 사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는 묘한 설득력을 느낀다. 어쩌면 저렇게 어떤 식으로든 현실을 눈감아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근심없는 밝은 미소같은 건 아이나 백치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생각의 끝은 또 비극을 향해 달려간다. 그러므로, 그리하여, 나는 영영 행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 이 생각을 어떻게 해야 떨쳐버릴 수가 있을까. 나는 때로 아주 유쾌한 사람이지만, 행복한 사람은 되지 못하리라. 하물며 저렇게 재미없는 "행복"은 싫다.

 같은 맥락에서 타블로의 말대로 세상의 많은 꿈들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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