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코는 당신 냄새를 맡는다

 채호기

당신으로부터 결별의 말을 듣고 난 뒤에도 나는
밤에는 잠자고 아침에는 깨어났다.
수영을 하면서 근육을 부드럽게 풀고
세 끼니를 거르지 않고 먹었다.
아무런 문제없이 회사 일을 처리했고
사람들을 만나 태연하게 웃고 얘기했다.
눈과 귀에 번갯불이 떨어져 불타올라도
내 시력과 청력은 지극히 정상이었다.
심장을 출발한 피는 발톱 밑의 미세 혈관까지 거침없이 돌아다녔고
창자와 위도 꼬이고, 막히고, 터지지 않고 제 역할을 다했다.
나는 죽고 싶었지만 어이없게도
사람들은 내 얼굴 세포에 번지는 곰팡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나 내 코는 당신의 냄새를 줄기차게 맡았고
내 눈은 되풀이되는 당신의 영상 때문에 붉게 상기되었다.
내 뇌의 주름 주름마다 당신은 더 깊이 새겨졌고
내 손은 물건을 들 때도 당신을 더듬거렸다.


당신은 한 여름에도 흰 눈을 두른 큰 산 처럼
어디에서나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음 지었다.
휴일마다 다른 지방으로 멀리멀리 도망갔지만
낯선 거리 하찮은 골목의 한낱 쓰레기통 속에서도
당신은 예전의 그 눈길로 나를 쳐다보았다.
내게 원치 않는 이별을 강요했듯이 당신은
당신에 대한 기억에다 나를 가둬놓고 홀로 떠나버렸다.

 

 <손가락이 뜨겁다> 채호기, 문학과 지성사(2009) 중에서

 

 


 사랑은 오래된 추억으로 남아 떠나지 않는다.

 주말에 무한도전을 보는데 이제는 '반품남'이 된 하하와 노홍철이 서로를 놀리는 장면이 나왔다. 하하가 노홍철에게 괜찮냐고 물어보자 노홍철이 아무렇지도 않다고,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하하가 한 말이 일품이었다.

 "지금은 괜찮지? 한달 후에 너 죽을 거야."

 장난조로 한 말이었지만, 정작으로 그 사람이 그리워지는 건 적어도 그 정도의 시간은 지난 후이다. 태연을 가장하기에는 너무 약해져 있을 때, 기억은 불쑥 찾아온다.

 

 p.s.
비가 오니 시도 읽고
허튼 소리도 하고... 뭐 그러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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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oi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