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난 좀 삐딱한 인간인가 보다. 많은 이가 좋다고 말했던 이 책, 동양 제일의 작가라고도 불리워지고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이 책에 대해 감히 이렇게 이야기해본다. 과연 카프카는 성장했느냐고. 그의 선택과 자유의지는 어디서 찾을 수 있느냐고.

 "모든 것은 상상력의 문제다. 우리의 책임은 상상력 가운데서 시작된다."(상권 p.256)
라고  이 책은 말한다. 내가 삐딱한 이유는 상상력이 부족해서 일까?


 주인공 다무라 카프카의 생에는 수많은 메타포가 숨겨져 있다. 불가사의하고, 이해할 수 없는 모든 설정들은 메타포일 것이다. 아버지는 "외계인"에 비유되고 있다. 나카타 상은 미스테리한 사건 후에 "빈 공간"으로 일생을 살았다. 카프카는 아버지로부터 "저주" 받았다. 사에키상은 "소녀"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이야기 흐름의 큰 줄기만을 보자면 거의 모든 것은 카프카의 아버지가 의도한 대로 돌아가고 있다. 결말만은 의도한 대로 되지 않았지만. 결국 카프카는 예정되어 있던 존재였고, 모든 일은 준비되어 있었던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오차 없이, 치밀하게. '터프하게' (나는 이 단어를 그토록 강조하는 것이 좀 우습게 여겨졌지만) 성장해나간다는 소년은 매우 미묘한 지점에 미묘한 포즈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자의적으로 한 행동들은 결국 모두 예정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예정된 저주를 빠르게 해치우는 것에  더 관심이 있어보인다. 운명과 맞서 싸우거나 대응하는 대신에.


 분명히 이 소설은 흥미롭다. 끝없이 이어지는 고전의 인용구들도 그랬고, 번갈아 진행되는 이야기가 하나의 접점을 향해 달려나가는 것도 그랬다. 미스테리어스한 여러가지 소재들도 그러했다. 설명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만큼 매력적이었다. 나카타상이 겪은 의문의 사건의 이유가 무엇인지도, 조니 워커가 왜 그 마을에 들어가려고 하는지도 설명해주지 않는다. 사에키상과 딸이 왜 헤어졌는지도 설명해주지 않는다. 사쿠라가 카프카의 누나인지 아닌지도 설명해주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아마 이런 식으로 설명이 부족한 채 끝을 맺은 이유는 말로는 설명하기 부족하다는 그 "마을"과 동일한 의미선상(이 소설의 용어로 치자면 '메타포')에 이 소설을 두고 싶었기 때문이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작가는 설명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이 소설에서 카프카의 성장이 이루어지는 과정은 신비하고 알 수 없는 이끌림으로만 점철되어 있다. 선택의 지점은 매우 좁았다. 성장'한' 것인지, 성장'당한' 것인지 알 수 없을 지경이다. 오히려 바보 이미지의 가면을 쓰고 있는 나카타 상 쪽이 더욱 성장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모든 사태의 예정된 운명에 대항한 것은 오히려 그가 아닌가. 아니면 얼떨결에 합류한 호시노라든지. 카프카가 아버지의 저주에 대항하기 위해 한 일은 집을 떠나온 일 외에는 고작 삼림욕과 독서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헷갈리는 것이다. 결국 카프카는 비극적인 사건을 겪었기에, 어떤 식으로든 성장하긴 했겠지만 그건 내가 생각하는 '성장'의 의미와는 꽤나 다른 것이라서. '질 것이 뻔한 싸움(운명에 대항하는 싸움)이라도 끝까지 맞서 싸우는 중에 인간은 성장한다.'라는 내 생각이 고루한 것이라면 더이상 할 말은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소설이 흥미로운 소설이라고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미묘한 일이다.



p.s.
흥미로운 관련 포스팅이 있어서 링크합니다~
해변의 카프카 한국판 가상 캐스팅 - http://blog.naver.com/nonameone/70037550556
(호시노 역에 특히 주목할 것)



 

Posted by poise


(이미지출처 : Yes24)



 상상력은 비극적인 방향으로 흐르기 쉽다. 인간은 오랫동안 비극을 사랑해왔다. 또, 어떤 이는 비극이 희극보다 예술적으로 훨씬 우월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강의 내용을 후학들이 글로 남긴 <시학(詩學)>이라는 책은 시에 대해 다루면서, 특히 비극만을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희극에 대한 내용이 담긴 2부가 있었으리라 예상되지만 전해지지는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희극은 실제 이하의 악인을 모방하려하고, 비극은 실제 이상의 선인을 모방하려 하기 때문이다." 즉, 희극은 윤리학적으로 선하지 않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비극을 만들어내고, 비극에 매혹되는 이유를 아주 간명하게 제시해주고 있다.


 그의 말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시인의 임무는 실제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일, 즉 개연성과 필연성의 법칙에 따라 가능한 일을 이야기하는 데 있다.... 따라서 시는 역사보다 철학적이고 중요하다. 왜냐하면 시는 보편적인 것을 말하는 경향이 더 강하고, 역사는 개별적인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라는. 이 두 가지 말을 종합적으로 이해한다면 이렇게 쓸 수 있지 않을까? "시인은 일어날 수 있는 비극을 제시하여야 하며, 그 안에 실제 이상의 선인을 등장시켜야 한다."


 서론이 길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문학관은 현대 소설인 코맥 매카시의 <로드>를 그대로 관통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에는 문학의 장르가 지금처럼 분류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시학>에서는 필연적으로 서사시, 비극, 희극, 송시, 드라마, 찬가, 풍자시 만이 디뤄지고 있다.하지만 가장 마지막에 발생한 문학 장르인 소설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은 여지없이 통하고 있다. 적어도 이 소설을 볼 때는. 



 인간이 생각해내는 여러가지 비극 중에서 '지구의 종말'이라는 주제는 그리 참신한 주제는 아니다. 이미 태어나고 죽은 많은 사람들이 그 문제에 대해서 생각했고, 각각의 상상력을 구체화한 시와 소설과 그림과 영화 등이 존재한다. 그리고 가끔은 예술가가 아닌 우리같은 이들도 이 문제에 깊이 빠져들 정도이니 이 주제가 닳고 닳은 주제임은 분명하다. 물론 과거보다는 현재가 그런 일이 일어날 개연성이 더 높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환경문제나 자원고갈, 핵무기 등으로 인해서)  하지만 우리는 주제가 같다고 해서 그 모든 작품들을 똑같다고 보지는 않는다. 플롯, 어조(혹은 문체), 표현의 방식, 작가의 태도나 세계관 등 많은 변수들이 이 문제를 실체화하는데에 관여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로드>는 아주 간단한 구조로 되어있다. 이 땅은 어느날 갑자기 알 수 없는 이유로 파괴되었다. 모든 식물과 동물이 죽었다. 전기도 끊겼다. 살아남은 인간들은 살기 위해 몸부림치며 그나마 남아있는 가공식품과 물, 옷가지, 석유 등을 차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가장 기본적인 욕구에 기본적으로 반응하는 인간만이 그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 비극의 시작이다. 어째서 인간이 그렇게까지 악해질 수 있으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역설이 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아주 바람직하고 착한 이 소설의 주인공들과 마찬가지로 온갖 만행을 저지르며 살아남은 자들 역시, 목숨을 이어가는 이유는 똑같이 '희망' 때문이다. 그들은 살아있으면 언젠가 '다른 미래'가 올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여기서 서로가 그리는 '다른 미래'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는 것이다. 위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따르기라도 하는 듯이,, 이 소설의 주인공인 아버지와 아들은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특히 희망적인 시대에는 한 순간도 살아본 적 없는 아들이 더욱 그렇다는 사실은 고무적인 일이다. 아버지에게서 전설처럼 전해들은 '좋은 사람'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반추하는 어린 아이. 작가가 성선설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아버지와 아들은 모두가 서로 돕고 사랑하는 사회가 오기를 바란다. 반면 윤리와 도덕을 버린 자들이 그리는 사회는 그저 배고픔이 사라지는 사회이고, 육체적 괴로움이 사라지는 사회일 것이다. 이런 근본적인 가치관의 차이가 이들의 삶의 방향을 완전히 가름한다.


 소설은 <로드>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여정 형식으로 되어있다. 나그네로 떠도는 주인공들은 수많은 절망을 목격하고, 위기에 처하기도 하고, 기적처럼 먹을 것을 구하기도 하고, 다시 굶주리기도 한다. 때로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의 기로에 서기도 한다. 아이의 순수가 아버지를 구원하기도 하고, 아버지의 목숨이 아들을 살리기도 한다. 그렇게 페이지를 넘기다보면 어느새 이 문제를 해결하기엔 적절하지 않은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페이지가 몇 장 남지 않았음을 발견하게 된다. 어떻게 끝을 맺을 것인지 조바심이 나면서도, 나처럼 다음 장으로 넘기기에는 두려울지도 모른다. 결국 이 소설은 비극이고, 비극으로 끝나지만 그래도 마지막 페이지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다.


 인간답게 사는 것과, 그저 사는 것과의 차이. 우리는 이 개연성있는 비극이 현실로 닥치기 전에 그 차이를 알아야 한다. 코맥 매카시는 우리에게 바로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글을 읽는 독자들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인간의 여정을 이끄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 소설에서 발견하길 바랐을 것이다.






p.s.
비슷한 주제의 소설을 추천한다면, '눈먼 자들의 도시'를.
영화로는 '배틀 로얄'과 '우주 전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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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사람이 읽은 책에 대해, 이제와서 감상을 적는다는 것은 무의미하기도 하고 쑥쓰럽기도 한 일이다. 어떤 리뷰를 쓴들 그 소설 자체보다 그 소설을 더 잘 이해하게 할 수는 없다. 언어를 낭비하고 싶지 않다. 여기에는 부족한 나의 능력에 대한 약간의 변명도 얼마간 포함되어 있지만.


 그냥 짧게 적고 싶다. 개츠비는 로맨티스트였으며, 로맨티스트이기 때문에 위대했다. 이 시대의 많은 이들이 위대하지 못한 이유는 낭만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도, 아마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는 닉이거나, 데이지이거나, 톰이거나, 조단일 것이다. 아니면, 그보다 더 나쁘거나.


 산업시대의 어떤 시점을 분기로하여 우리는 사랑에 대한 신뢰를 급격히 잃어왔다. 그러나 개츠비는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을 때, 그렇게 했다. 그가 가진 위대함은 그것이 전부다.  그 사실은, 우리에게 그래도 그런 사랑이 이 세상 어디엔가  다만 한 조각이나마 남아있지 않을까하는 식의, 가늘게 팔딱이는 어린 새의 심장같은 연약한, 그러나 살아있는 희망을 남겼다.


아직도 먼 불빛을 바라보는 것으로 사랑을 지탱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한 사람은 남아있을까? 어쩌면, 당신을 사랑할지 모를 누군가를 위해 오늘 하루쯤은 침실의 불을 끄지 않고 잠드는 것이 낭만일 지도 모른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작년 가을, 동부에서 돌아왔을 때만해도 나는 세상의 모든 사람이, 이를테면 유니폼을 입은 것처럼 균일해지고 또한 영원히 일종의 정신적 주의력을 기울여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말하자면 나는 특권이라도 부여받은 듯한 눈빛으로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요란한 유람이나 답사 같은 것은 더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오직, 개츠비 한 사람, 이 책에 이름을 부여한 그 한 사람만이 나의 반발을 벗어나는 예외였다 - 개츠비는 내가 경멸하는 모든 것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만일 끊임없이 연출되는 연기의 총체를 개성이라 한다면, 그에게는 무엇인가 현란한 개성이 있었다. 즉, 인생의 장래에 대한 어떤 고양된 감수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마치, 1만 마일 밖에서 발생한 지진까지도 기록할 수 있는 복잡한 기계와 연관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그러한 민감성은 '창조적 기질'이라고 그럴듯하게 불려지는 그 무기력한 감수성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다 - 그것은 희망을 갖는 탁월한 재능이며, 낭만적인 준비와도 같은 것인데 내가 다른 사람에게서는 일찍이 발견한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결코 다시 발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 그렇다. 결국 개츠비가 옳았다는 것이 밝혀졌다.내가 사람들의 절망적인 슬픔이나 주체할 수 없는 기쁨에 대한 나의 관심을 잠시나마 차단시켰던 것은 개츠비를 희생물로 이용한 것들, 개츠비의 꿈을 뒤따라 떠돌았던 더러운 먼지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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