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물


이병률

 

칼갈이 부부가 나타났다
남자가 한 번, 여자가 한 번 칼 갈라고 외치던 소리는
두어 번쯤 간절히 기다렸던 소리
칼갈이 부부를 불러 애써 갈 일도 없는 칼 하나를 내미는데
사내가 앞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두 사람이 들어서기엔 좁은 욕실 바닥에 나란히 앉아
칼을 갈다 멈추는 남편 손께로 물을 끼얹어주며
행여 손이라도 베일세라 시선을 떼지 않는 여인


서걱서걱 칼 가는 소리가 커피를 끓인다
칼을 갈고 나오는 부부에게 망설이던 커피를 권하자 아내 하는 소리
이 사람은 검은 물이라고 안 먹어요
그 소리에 커피를 물리고 꿀물을 내놓으니
이 사람 검은 색밖에 몰라 그런다며,
태어나 한 번도 다른 색깔을 본 적 없어 지긋지긋해한다며 남편 손에 꿀물을 쥐어준다
한 번도 검다고 생각한 적 없는 그것은 검었다
그들이 돌아가고 사내의 검은 어둠이 갈아 놓은 칼에 눈을 맞추는데


희다 못해 저절로 눈부신 칼날이
집 안 가득 떠다니는 지옥들마저 베어낼 것만 같다
불을 켜지 않았다
칼갈이 부부가 집에 다녀갔다

 

출전 :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시 2006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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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집


이병률


기억을 끌어다 놓았으니 산이 되겠지
바위산이 되겠지
여름과 가을 사이
그 산을 파내어 동굴을 만들고 기둥을 받쳐 깊숙한 움을 만들어
기억에게 중얼중얼 말을 걸다 보면 걸다 보면


시월과 십일월 사이
누구나 여기 들어와 살면 누구나 귀신인 것처럼 아늑하겠지
철새들은 동굴 입구를 지키고
집이 하나로는 영 좁고 모자란 나는
해가 밝으면 동굴을 파고 파고
그러면 기억은 자꾸자꾸 몰려와 따뜻해지겠지


그 집은 실뭉치 같기고 하고 모자 같기도 하며
어쩌면 심장 속 같기도 하여서
겁먹은 채로 손을 푹 하고 찔러넣으면
보드랍고 따스한 온기가 잡혀와 아찔해진 마음은
곧 남이 되겠다고 남이 되겠다고 돌처럼 굳기도 하겠지


그 집은 오래된 약속 같아
들여다보고 살고도 싶은 여전히 저 건너일 것이므로
비와 태양 사이
저녁과 초저녁 사이
빛이 들어 마을이 되겠지


그렇게 감옥에 갇혔으면 하고 생각한다
감옥에 갇혀 사전을 끌어안고 살거나
감옥에 갇혀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나 줄줄이 적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 기억하는 일 말고도
무슨 죄를 더 지을 것인가를 생각한다
성냥을 긋거나
부정을 저지르거나
거짓말이라도 해야 하는 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세상을 끊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또 태어나야 할 거라고 생각한다

 


출전 :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시 2008』 (현대문학)

 

 



 

Posted by po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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