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mapping The Human Soul
   


에픽 하이(Epik High)의 음악이 이제껏 마냥 밝고 산뜻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칙칙함으로 중무장한 이번 앨범은 전혀 예상 밖이다. 우울 삼매경. 물론 힙합은 모름지기 침울하고 어두운 맛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는 마니아들도 있겠지만 그건 미(美) 힙합의 황금기와 그 이후로 몇 년간 인기를 누린 단순하고 퍽퍽한 하드코어 비트를 향한 노스탤지어에 '주로' 국한되는 것이겠고, 이들의 멜랑콜리 노선은 음원 형태보다는 글에 촉수를 뻗치고 있다.

기본 노선과 정책은 우울함의 드러냄이고, 스물일곱 곡으로 그에 대한 구체적인 강령과 영적, 육적인 경험을 취합해 옮겨 놓는다. 음반의 중심을 관통하는 태도와 감성은 하나이건만 영역을 나눈 내용상의 차이가 있었을 터, (콘텐츠의 정렬 기준이 모호해 보이는 곡도 더러 있으나) 한쪽-The Brain-은 굉장히 사회적이고 대륙적 기상이 충만한 나머지 세상 온갖 고민 다 하다가 되레 그 무게에 눌려 고생하는 모습을 보이고, 다른 한쪽-The Heart-은 단순 연애사가 주를 이루는 지극히 개인적인 걱정거리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두뇌'와 '가슴'이 냉랭함을 공통분모로 두는 것은 다르지 않다.

이 얼음장같이 차갑고 어두운 면모를 지켜가며 원대한 포부를 밝히는 것에 욕심을 낸 나머지 초반부터 과잉이다. 일례로 '白夜'는 말이 너무 많아 지치게 한다. 장중해서 잠깐은 좋지만 장황해서 감흥이 떨어진다.

뒤이어서 가혹한 세상사에 지치고 외로움에 허덕이는 이의 모습을 그린 '알고 보니'가 싸늘한 기운의 바통을 받고 있으며 '희생양'과 'Nocturne'에서는 현 사회를 온갖 죄로 얼룩지고 타락할 대로 타락한 곳으로 규정하면서 정부에 대한 불신과 신에 대한 불만, 부정을 토로한다. 이쯤 되면 세상 밝게 살려는 사람에겐 완벽한 청각형 불온문서의 날림이다.

치정에 얽힌 여러 이야기를 털어내는 '가슴(The Heart)' 편에서도 잠잠하면서도 쓰라린 감정의 표출은 이어진다. 한 사람을 향한 광기 어린 사랑을 담은 타이틀곡 'Fan'도 분위기는 마찬가지지만 음악의 전개 방식은 앨범 수록곡 중 이질적인 스타일의 노래 중 하나일 것이다. 계속 쪼아대는 듯한 전자음은 극단적인 행동으로 치닫는 느낌을 배가하는 속도감을, 현악 프로그래밍으로 감싼 반주는 결국엔 그것도 사랑임을 역설함으로써 작게나마 따스함을 제시한다.

습한 상황의 연결은 그칠 줄을 모른다. 담배는 끊었지만 이제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연이 끊어져 버린 이의 고통이 깊게 느껴지는 '중독', 장난감 이상의 기계로 자리매김한 로봇의 고민까지도 이펙트를 줘가며 구슬프게 풀어내는 'Broken toys', 독백의 절묘한 오버래핑으로 섬뜩한 자살 버스(verse)를 완성한 '행복합니다'는 실로 불길함의 행진. 부모라면 반드시 자녀 손에 못 가게 할 음반 리스트에 올려놓아야겠다.

사랑 얘기야 귀에 차일 정도로 보편화된 소재니 어떻게 다루던 특별한 감도가 적은 게 사실이지만, 사회 문제를 노랫말로 옮기고 비판적이고 냉소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마치 영화 <주온>의 토시오 같이 내내 음침하게 구는 '너무 변한' 에픽 하이를 등장하게 한 배경이 궁금해진다.

아마도 방송에서 보이던 이미지를 음악으로나마 쇄신하고자 하는 욕심이 크게 작용했을 것 같다. TV에서는 귀엽고 치기 어린 장난꾸러기 같은 모습만 보여줬지만 음악만큼은 마치 '저희가 만판 가볍기만 한 그룹이 아니란 걸 보여드릴게요.'라고 말하는 것 같다. 전작들에서는 무게감 있는 노래를 실어도 타이틀곡에 가려 비중을 갖지 못한 아쉬움도 이유가 됐을지 모른다.

다른 원인 중 하나를 'FAQ'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터넷상에서 떠돌던 실제 악플을 나열한 노랫말은 에픽 하이가 '한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힙합 그룹'으로서 그동안 받은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였을지 대충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어 청진한다면 두 장의 CD를 통해 시종일관 드러내는 우울한 감정의 골에 대한 이해가 조금은 가능하리라.

다행히도 안티 팬들, 혹은 미덥지 않게 보는 마니아들에게 받은 압박은 긍정적인 시너지 효과를 불러일으킨 듯하다. MC로서의 다양한 표현방법을 모색-모든 곡에 문학 작품의 등장인물이나 성경 구절로 부제를 달아 이야기를 짜맞춰 보는 흥미를 제공-하고, 사회의 불합리한 모습에 대한 고찰과 소재와 주제를 폭넓게 수용함으로써 메시지를 강화하려는 욕심이 빚어낸 결과물은 안티의 비난도 무력화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메시지의 기분에 맞춰가는 과도하게 충직한 비트들로 인해 음반의 분위기는 다시 한 번 죽도록 무겁고, 무거워서 죽을 지경이다. 랩에서는 여러모로 색다른 접근을 시도하는데 비트와 연계한 풀이 능력은 단순하고 고루하기 짝이 없다. 그런 우중충한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서 일부러 그랬다면 매우 성공적이지만 그것 때문에 다시 듣고 싶지는 않을 음반이 돼버렸다. 혹시 우울함에 동참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여기에 붙어도 좋다.

-수록곡-
CD 1 - The Brain
1. The end times (Opening) (작곡 : DJ Tukutz)
2. 白夜 (작사 : Tablo, Mithra 眞 / 작곡 : DJ Tukutz)
3. 알고 보니 Feat. 진보 (Tablo, Mithra 眞, 진보 / DJ Tukutz)
4. 실어증 Feat. Paloalto (Tablo, Mithra 眞, Paloalto / Pe2ny)
5. Mr. Doctor Feat. 양키 of TBNY (Tablo, Mithra 眞, 양키 / 양키)
6. Runaway (MIthra's word) (Mithra 眞 / Mithra 眞)
7. Exile (Halftime) (Pe2ny)
8. Still life Feat. 진보, The Quiett, Kebee, TBNY, MC Meta (Tablo, Mithra 眞, The Quiett, Kebee, 양키, MC Meta, 톱밥, 진보 / DJ Tukutz)
9. 피행망상 pt.1 Feat. Junggigo (Tablo, Mithra 眞, 고정기 / DJ Tukutz)
10. 희생양 Feat. Sweet Sorrow (Tablo, Mithra 眞 / Tablo)
11. Nocturne (Tablo's word) (Tablo / DJ Tukutz)
12. 혼 (Tablo, Mithra 眞 /김범종)
13. In peace (Closing) (DJ Tukutz)

CD 2 - The Heart
1. Slave song (Overture) (Tablo / Tablo)
2. Flow Feat. Emi Hinouchi (Tablo, Mithra 眞 / Tablo)
3. Love / Crime (Fan prelude) (Tablo)
4. Fan (Tablo, Mithra 眞 / Tablo)
5. 거미줄 Feat. Itta (Tablo, Mithra 眞 / Tablo)
6. 선곡표 Feat. DJ Zio (Tablo, Mithra 眞 / DJ Zio)
7. 중독 Feat. Wanted (Tablo, Mithra 眞 / Pe2ny)
8. Underground railroad (Intermission) (Pe2ny)
9. FAQ (Tablo, Mithra 眞 / Tablo)
10. Love love love Feat. 웅진 of Casker (Tablo, Mithra 眞 / Tablo)
11. Girl rock Feat. Jiae (Tablo, Mithra 眞 / Tablo)
12. Broken toys Feat. Infinite Flow (Tablo, Mithra 眞, Young GM, 넋업샨 / Tablo)
13. 행복합니다 Feat. JW of Nell (Tablo, Mithra 眞, JW / Tablo)
14. Public execution (Finale) (Tablo)

  2007/02 한동윤 (bionicsoul@naver.com)


출처: http://www.izm.co.kr/  (음악평론가 임진모의 음악 관련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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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4집의 그 우울과 무게를 좋아한다.
굉장한 쓴소리다.


Posted by poi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