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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밤 10시에 가까운 시각, 스튜디오의 창가에는 어느새 벨벳 커튼같은 어둠이 드리워져 있고 넬의 음악이 스튜디오의 농밀한 공기 속으로 담담하게 퍼지고 있다. 이윽고 김종완(보컬), 이재경(기타), 이정훈(베이스), 정재원(드럼), 이렇게 ‘넬(NELL)’이라는 이름의 네 명이 스튜디오로 들어선다. 그들의 음악은 영화 <Abyss>의 깊은 바닷속처럼 내 안의 무수한 모습들과 화해하고 싶어질 때면 들어가 앉고 싶었던 공간이었다. 그럴 때마다 무의식 중에 당연하다는 듯 CD 플레이어에 넬의 앨범을 올리곤 했었다. 그 때의 감정들이 기억을 지나 천천히 걸어오는 것만 같아 비현실적으로 아득한 기분이 들 무렵, 촬영 준비를 마친 네 명의 젊은이는 심해의 물빛을 닮은 푸른 벽 앞에 엘르의 카메라를 마주하고 앉았다.

 

스물 아홉, 다시 출발선에 서다
재작년 가을, <Healing Process>앨범의 인터뷰로 넬을 마주했을 때 그들은 왠지 조금 상기되어 보였다. 그 때 넬의 4명은 입을 모아 ‘우리가 하고 싶었던 바로 그 음악’이라 했었다. 2006년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최고의 음반으로 꼽히기도 했던 그 앨범은 음악계의 살인적인 불황 속에서도 3만장 넘게 판매되며 우리 나라 대중음악의 역사상 드물게 인디에서 메이저로 성공적으로 입성해 온 넬이라는 밴드의 존재감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었다. 그리고 2년 여의 시간이 지난 지금, 새 앨범 <Separation Anxiety>와 함께 돌아 온 그들의 모습은 짐작한 그대로이기도 했고 동시에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것이었기도 하다. 테이크 아웃 커피를 마시듯 음악을 파일로 듣고 버리는 것에 너무 익숙한 인스턴트의 시대, 하지만 음악이라는 순수한 원형에 좀더 다가가려는 그들의 온전한 열정은 짐작-아니 믿음이라는 말이 정확하겠다-한대로 변함이 없었다. 피상적으로는, 데모곡까지 50곡 이상, 스튜디오 작업에서 앨범에 넣고자 한 노래만 27곡이라는 숫자만 봐도 그렇다. 다만 이번엔 ‘Less is More’의 미학을 따르기로 했다. “앨범을 두 장으로 낼까도 생각했어요. 하지만 좀더 완성도가 높은 한 장을 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한 곡 한 곡 좋을 순 있어도, 앨범의 조화라는 것이 있으니까요(이재경)”. 그 결과 앨범에 실린 11곡에는 감도 높은 서정성과 우울의 정서, 마니아와 대중을 아우르는 풍부함이라는 고유의 문법은 여전한 채, 한층 정교하게 조율된 현재진행형이자 미래진행형의 시제가 담기게 되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은 새 앨범을 관통하는 화두인 ‘분리 불안(Separation Anxiety)’이란 부분이다. 전작 앨범을 통해 그들의 ‘치유 과정(Healing Process)’이 일단락되었을 거라 생각했던 건, 장르니 컨셉트니 하는 외피를 좇는데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리스너의 섵부른 속단이 화수분처럼 마르지 않는 예민한 감수성을 따라가는 데 역부족인 것일 게다. 그들의 성장통은 아직 끝나지 않은 듯, 아니 어떤 의미로는 지금부터 시작되는 듯 보였으니까. 그러고 보니 1999년 동네 친구들로 만나 밴드를 결성했던 소년들은 10년의 시간을 지나며 어느새 스물 아홉의 청년들이 되었다. 그래서, 일부러 규정짓기라는 걸 알면서도 ‘넬에게 30대가 된다는 건 어떤 의미인지?’라는 질문을 던져 본다. “29살이라는 것에 큰 의미는 없는 것 같아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니까요. 하지만 이런 느낌은 좀 있죠. 저희에게 ‘넬’이라는 건 온전히 20대 자체를 의미하는데, 한 세대라고 할까 요즘 그걸 갓 정리하고 있는 시점이니까 우리 자신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우리에게 있었던 일들, 우리가 해 왔던 것들과 우리가 하고 싶었지만 아직 이루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서요(김종완).” “저 같은 경우는 간단히 말해서 지금은 음악이 너무 재밌는데 언젠가 음악이 재미없어져 버리면 어떻게 하지란 불안감이 크죠. 모든 것을 다 쏟아냈는데 그게 재미 없어져 버리면 진짜 공허할 것만 같아요. 음악만은 싫어지지 않았으면 해요(이재경).”
누군가 ‘아티스트는 고통스러워야 한다’고 했던가. 그러니 이율배반적이게도 소년들의 성장통이 담긴 새 앨범은 고스란히 새로운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또 한 번의 계기가 되고 있다. 때론 한없이 침잠하다가도 어느 순간 위태롭게 여겨질 만큼 폭발하던, 그래서 치명적으로 아름답던 보컬은 소나기가 지나간 뒤 문득 올려다 본 하늘처럼 담담해졌고-심지어 ‘나를 떠나지 마요’라는 애절한 가사를 노래할 때조차-, ‘기억을 걷는 시간’은 에디터로 하여금 “이 곡을 타이틀 곡으로 정한 이유는 뭔가요?”란 질문을 던지게 할 만큼 건조한 느낌으로 타이틀 곡의 전형에서 과감히 비껴가 있다. 일반적으로는 락 밴드의 필수 요소처럼 느껴지는 일렉 기타가 아예 배제된 곡이 있는가 하면, 뮤직비디오와 앨범 발매 공연에서는 기타리스트 이재경이 기타 대신 건반을 연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기도 했다. 댄서블한 느낌의 ‘Tokyo’는 넬의 음악도 기분 좋게 그루브를 타며 즐길 수 있다는 매력을 열어 보이고 있다. “도쿄라는 노래같은 경우엔 사실 그런 생각을 좀 했었어요. 우리 공연 오는 사람들도 이 노래만큼은 춤을 출 수 있겠구나(웃음). 그래서 공연 때 리듬에 맞춰 춤추시는 분들 보면서 재밌었던 것 같아요. 바램대로 되서 기분이 좋았죠(이정훈).”

그러니 넬을 모던락이나 브릿팝 밴드로 한정하는 건 더 이상 온당치 않아 보인다. “사실 많은 분들이 새롭다고 느끼는 부분들은 예전부터 줄곧 해오던 작업이었어요. 이번 앨범에서는 프로그래밍된 부분들이 많이 추가됐기에 그렇게 느낄 거예요. 다만 우리가 좀더 숙련되고 연구를 많이 해야하는 부분들이 있었기에 작업을 해도 앨범에는 싣지 못하는 곡들이 있었던 거죠. 이전까지 실력 면에서 많이 표현하지 못했던 것들이 있었다면 이젠 그런 것들이 좀더 줄어든 것이겠죠(김종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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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라는 진정성
지난 4월 4일부터 3일간 열렸던 앨범 발매 공연에서 보컬 김종완은 객석을 바라보며 ‘이렇게 같이 나이들어갔으면 좋겠다’라 이야기했다. 아마 그 때 이해했었던 것 같다. 사람들은 왜 가장 소중한 순간에 세상에서 가장 진부한 표현을 쓸 수 밖에 없는지를. ‘사랑해’, ‘고마워’, ‘미안해’와 같이 진부한 표현들이 가장 보편 타당한 어법이라는 것도. 그래서 ‘고맙다’고 얘기하고 싶었다. 넬이라는 밴드로 인해 인생의 풍성하고 새로운 결을 알게 되었고 그건 무척 즐겁고 행복한 경험이라고. 그리고 아마 그들도 팬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나 보다. “일차적으로는 음악을 함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나 기분보다는, 음악하는 사람이 가장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어요. 앞으로도 그럴 것 같고. 다만 활동을 하면서 우리 음악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되는가에 대해 느끼게 된 일들이 좀 있었어요. 어떤 사람들로부터 우리 음악이 큰 힘이 되어서 힘들었던 시기를 잘 보내게 되었다는 얘기들을 들으면서, 그들에 대한 책임감 보다는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음악이 누군가의 인생을 변화시키고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거든요. 우리는 그저 우리 음악을 할 뿐인데 이렇게 우리 음악을 좋아해주고 크게 감동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을 하니까 계속 좋은 음악을 많이 만들고 열심히 활동해서 사람들에게 크던 작던 기쁨을 주고 싶단 생각을 했어요. 그렇게 함께 가고 싶은 거예요(김종완).” 흔히들 사랑 노래로 알고 있는 1집의 ‘Stay’가 실은 그런 마음으로 음악과 대화하고 싶었던 곡이라면, 이번 앨범에서는 ‘Promise Me’가 그렇다. “그런(메시지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노래를 한 번 쯤 해보고 싶었어요. 음악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굉장히 중요한 시기에 와 있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내 인생에서 내가 택한 이 길을 후회하기 시작하면 30대에 더 힘들어질 것 같아요. 사실 넬 멤버 모두 개인적으로 슬럼프가 올 때도 있거든요. 음악하는 게 항상 즐겁지 만은 않고 힘들 때가 있는 거예요. 물론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우리와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 혹은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해도 그들 모두에게 일종의 용기같은 걸 줄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예요. 제 자신과 그들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줄 수 있는 음악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만든 노래이죠(김종완).”
햇수로 10년째, 단 한 번의 멤버 교체 없이 한 길만을 달려온 넬은 요즘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자랑스러워할 만한 소위 ‘대박’을 터트리고 있는 중이다. 공연을 할 때마다 단시간 내 매진되는 것이나 한국 음악계를 통 털어 앨범 판매량 1위, 공중파 방송 음악 프로그램에서 상위권 랭크라는 기록들이 단적인 예. 그런데 정작 본인들은 기쁨과는 별개로 음악씬 내에서의 ‘위치’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의외로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한다. “넬은 재밌고 신기한 케이스인 것 같아요. 주류와 비주류의 사이에 있다고나 할까요. 어떤 때 보면 완전히 주류 같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완전히 비주류 같기도 하고. 만약 우리가 어떻게 되기를 원하느냐고 굳이 대답해야 한다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위치’라는 문제보다는 우리 음악을 좀더 많은 사람들에게 왜곡없이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전달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우리의 관심사예요(김종완).” 맞다. 어쩌면 모범 답안처럼 들릴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거기서 결코 ‘가식’이란 단어를 꺼낼 수 없는 이유는 이들의 앨범이나 공연을 단 한 번이라도 직접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는 ‘진정성’ 때문이다. 이들은 공연장이라는 같은 공간 속에서 밴드와 관객이 하나가 될 때 무척 행복하고(정재원), 넬로서 만들어내는 음악에서 오는 희열을 잊지 못하는(이재경) 뜨거운 가슴과 아무리 어려운 일들이 있어도 멤버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모두 지나가는 일일 것이라고 다 이겨낼 수 있다고 다짐하는(김종완) 자신감과 강한 유대감이 바탕이 된 오랜 우정이 있기에 지금까지 ‘넬’이라는 이름을 지켜올 수 있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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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물론 아직까지도 넬이라는 밴드가 생소하다 해서 무작정 낯설어 할 필요는 없다. 그들의 음악은 ‘우연한 방문자’처럼 찾아와서 ‘기억을 걷는 시간’의 가사처럼 우리의 일상 깊숙이 스며들어 어느날 문득 느끼게 되는 유전자를 지녔기 때문이다. 에디터에게도 그랬다. 동경의 어느 작은 골목을 홀로 걸을 때나, 모델들이 리허설을 마친 텅 빈 패션쇼 무대에서나 그들의 시간은 한결같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오래도록 아껴두고 싶은 빈티지 와인처럼 세월이 흐를수록 깊어가는 소중한 체험임에 분명하다. 본연의 성정을 잃지 않으며 끊임없이 제 모습을 바꿔 흐르고 흐를 강물처럼, 넬이라는 이름의 한없이 투명한 블루는 그렇게 여전히 진화 중이다.

 

*자세한 사항은 엘르 본지 5월호를 참고하세요!

패션 에디터: 강정민
사진: JEON JAE-HO
진행 어시스턴트: 이정은
헤어: 준호(헤어 살롱 0809 부원장)
메이크업: 육근영, 아경파피루스

 

http://www.elle.co.kr/entertain/MusicView.html?AI_IDX=3654


Posted by poi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