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CD 30트랙 + 소책자

 흔히들 에픽하이가 '웃기는' 그룹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음악도 '대충'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 안타깝다. 하지만 오히려 지금까지의 에픽하이를 있게 한 것은 완벽함에 대한 강박과 신경증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작업 도중인 이들의 쾡한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았다면, '대충'이라는 말을 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힙합씬에서는 댄스음악이라고 매도하고, 댄스음악 쪽에서는 또 아이돌이 아니라서 외면당하는 그런 이상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을 때에도, 이들은 일렉트로닉을 포기하지 않았었다. 거기다, 러브스크림에서는 선율을 강조하는 어쿠스틱한 악기들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마치 일본의 누자베스나 미치타처럼. 그러더니 기존의 소속사에서 독립을 했고, 다시 맵더소울이라는 음반을 통해 랩을 강화하고, 누구도 선뜻하지 않는 힙합 리믹스 앨범을 냈다. 그러는 한편으로는 해외로 발을 넓혀 가는 곳마다 매진되는-비록 소규모일지라도- 공연을 펼쳤다.

 

 에픽하이에게는 소신이 있다. 분명한 기준이 있다. 그 기준은 스스로의 작품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함량미달의 음악을 내놓는 것은 그네들의 자존심이 허락치 않는다. 날카로운 잣대로 세상과 음악을 바라보기에, 스스로에 대한 기대치도 높아질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날을 세우고 가다듬은 탓에 이번 앨범 [e]는 한창 자라났다.

 

 1집, 2집, 3집, 3.5집(2CD로 바뀜), 4집, 5집, 러브스크림, 맵더소울, Remixing the human soul, 그리고 [e]. 세어보니 어느새 열번째 앨범이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자신들의 세계를 지키며 열 장의 앨범을 냈다는 것, 그것 자체로 에픽하이는 귀하다. 쉽게 갈 수 있는 방법이 있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3, 4, 6집은 2CD로 구성되어있고, 러브스크림, 맵더소울, [e]는 소책자가 포함되어 있다. 별 수익도 없는 구성이지만, 에픽하이는 기꺼이 그렇게 했다.

 

 이번 앨범 [e]는 5집 이후, 에픽하이가 행했던 여러 실험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러브스크림에서 해보았던 감성을 자극하는 멜로디는 CD1 Emotion에, 맵더소울 앨범에서 실험했던 '생각'을 담은 거친 랩은 CD2 Energy에 반영되었다. 그리고 리믹스 앨범을 통해 완벽히 호흡을 맞춘 플래닛 쉬버와의 작업, 외국 힙합 뮤지션과의 공동작업까지. 이미 한 차례 실험을 거쳤기에 좀 더 완성되고, 성숙해진 느낌이다. 이 앨범은 그간의 작업을 통해 자신들의 색을 분명히 하고, 또한 앞으로의 방향성을 결정짓는 시점이기에 더욱 의미가 있다.

 많은 트랙 탓에 각각의 곡에 대해 리뷰를 쓰는 것은 지루한 일이 될 것이다.  곡 제목만 다 써도 스크롤 압박이 느껴질테니까. 음악은 들으면서 느끼면 그만이지 거기에 대해 논문을 읽을 필요성은 못 느낄테고. 그저 짧게 얘기하자면 에픽하이에게서 조금이라도 '진정성'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구입해도 절대 후회하지 않을 음반이다. 거기다 600원씩 주고 음원을 구입하면, 인터넷 샵에서 CD를 사는 것보다 조금 더 비싸다. 그러니 음반을 사는 게 경제적으로도 더 이익이라는 것이다. 

 

 그래도 의심이 많은 분이라면, 앨범 수록곡 중에서 MoonWalker, Excuses, 트로트, 선물, Happy Birthday to ME, Heaven, Breathe, Supreme 100, Rocksteady, 말로맨, Madonna, High Technology, 흉, Lesson 4 등을 들어보고 결정하시면 되겠다.

  

p.s.

타블로의 열애와 결혼 탓에 상심해서 드러누웠던 sensitive한 여성팬들도 앨범을 듣고는 이구동성으로 '사람은 미운데(?) 음악이 좋으니 어떡하면 좋으냐'며 울분을 토했다.ㅋㅋ

 

 


Posted by poi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