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핏하면 뭔가가 죽도록 좋아지는 증세 덕분에 어릴 때부터 무언가의, 누군가의 팬으로 죽 살아왔다.

시골에서 서울로 대학 시험을 치러 와선 혼자 두어 시간 버스를 타고 체육관을 찾아 농구 경기를 봤다. 혼자 찾아갔던 콘서트장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직장인이었던 20~30대 주춤했던 나의 ‘팬질’은 백수가 된 요즘 인터넷과 위성중계 같은 미디어들과 맞물려 ‘폐인’ 수준으로 접어들고 있다. 프리미어리그와 박지성과 박주영, 김연아, 에픽하이에 빠져 날이면 날마다 경기 보고 팬카페 들어가는 게 주요 일과다. 사춘기 아들과는 만날 “그거 봤어?” 하며 시시덕대고, 축구장과 콘서트장에서 같이 꽥꽥 소리 질러대며 자식한테 대단한 일이나 해준 부모처럼 자랑스러워한다.

영원히 철들지 않는 이 ‘팬심(心)’은 이제 ‘팬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한마디쯤은 할 수 있게 한다. 닉 혼비의 ‘피버피치’를 원작으로 한 영화 ‘날 미치게 하는 남자’의 대사가 본질을 쿡 찌른다. “당신은 레드삭스를 사랑하죠. 근데 레드삭스도 당신을 사랑하나요?” 그렇다. 감히 말하자면 ‘조건 없는 숭고한 사랑’으로 치자면 모성애와 더불어 ‘팬덤(fandom)’이 으뜸이다. 그 존재 자체로도 우리에게는 보답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불어 진정한 팬의 즐거움은 대상에 대한 사랑뿐 아니라 팬들만이 만들어내는 아득한 연대감을 느끼는 일이다. 콘서트장에 내려앉은 객석의 어둠 속에서 흔들어대는 야광봉의 거대한 물결, 하나도 틀리지 않고 외쳐대는 먼 나라 가수의 노래 구절, 감격하는 스타의 모습에 뜨겁게 되돌려보내는 환호. 경기장에선 “죽여라” “살려라” 온몸의 힘을 다해 퍼붓는 욕설로 터져나오는 애증. 경기장을 나설 때의 씁쓰레한 느낌. 그러나 또다시 새로운 경기에 앞서서 지난 경기들의 과오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부풀어 오르는 한없는 희망. 이 알 수 없는 사이클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팬덤의 미스터리는 ‘팬’이 되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결코 느끼지 못한, ‘우리만의 세상’의 소중한 느꺼움이다.

그렇게 팬으로 살아온 인생에 뭐가 남았느냐고 물어본다면 사실 할 말은 없다. 그래도 팬이었기에 사는 것이 그저 회한과 아픔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열정과 환희를 일깨워줬다고, 그것이 내 젊은 시절의 전부이자 마음속 공허함이 쏟아져 내리지 않게 해주는 댐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헛헛하고 고달픈 삶을 느끼는 사람에게 나는 여전히 무엇인가의 ‘팬’이 되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윤정, TV 칼럼니스트

09.4. 7. 중앙일보   삶의 향기 코너에서 발췌  -> 넬동 '처음'님



-------------------------------------------------------------------------------------


팬이 되어서 재밌는 일이 참 많아요. ^^

Posted by poi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