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자녀 모두 美명문대 보낸 타블로 어머니 김국애 원장
“아이들이 저희에게 준 추억과 기억만으로 빚은 다 받았다고 생각,
공부 때문에 아이를 외롭게 만들지 마세요"


김국애 헤어포엠 원장(62)에게는 꽤 오래전부터 인터뷰 요청을 해오던 차였다. 방송에서 보여지는 타블로의 예의 바르고 영민한 모습에 ‘어머니는 어떤 분일까?’ 하는 개인적 호기심이 반이었고, 타블로를 비롯한 세 자녀 모두 미국 명문대에 보낸 교육 비법 또한 궁금했다. “아무리 부모라 해도 장성한 자식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조심스럽다”며 인터뷰를 거절해오던 김 원장을 여름이 가기 전 만날 수 있었다. 작지만 단단해 보이는 체구에 앳된 미소, 김 원장은 환갑이 넘은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생기 있는 표정과 따뜻한 에너지를 가진 분이었다.

가난했던 부부, 누구보다 확고했던 자식교육에 대한 꿈
“아이 셋을 어떻게 키웠냐는 질문을 많이 받아요. 그럴 때마다 남편이 70%를 했다고 대답해요. 결혼 전부터 남편은 가족과 자식에 대한 완고한 철학이 있었거든요.”

데뷔 때부터 ‘스탠퍼드 대학원 출신의 수재’로 화제가 되었던 가수 타블로. 얼마 전 형과 누나도 각각 미국의 명문 컬럼비아대학원과 코넬대학교를 졸업한 사실이 알려지며 ‘엄친아 가족’으로 다시 화제를 모았다. 어머니 김국애 원장은 45년 동안 미용업에 종사해온 미용인이다. 자식 셋을 모두 미국으로 대학을 보냈을 정도면 부모가 굉장한 재력가일 것이라는 게 많은 이들의 생각이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들 부부의 시작은 매우 가난했다.

“남편과 저 둘 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그 시절엔 누구나 가난했지만, 전쟁고아로 고아원에서 자란 남편은 상상할 수도 없는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하고 자수성가한 사람이에요. 저 역시 11형제 중 6째로 집안 형편이 풍족하지 못했죠. 그런 환경을 겪어서인지 결혼해서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모범적인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생각을 꿈처럼 품고 있었어요. 특히 자식을 낳으면 최고의 교육을 시키겠다는 확고한 목표가 있었죠.”

가난한 전쟁고아와 섬처녀가 만나 그런 꿈을 꾸었다니, 지금 생각하면 참 허무맹랑한 꿈이었다. 하지만 자식들을 세계의 중심이 되는 국제인으로 키우겠다는 남편의 의지는 ‘신성불가침’과 같은 것이었다고 김 원장은 말한다. 목사님의 소개로 서울대 토목과에 재학 중이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고 30만원짜리 셋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면서 이들 부부는 한 걸음 한 걸음 꿈을 키워 나갔다.

“워낙 어렸을 때 힘들게 자란 남편은 고생하는 것에는 겁이 없는 사람이에요. 저 역시 미용 일을 하고 있었고, 둘 다 기술이 있으니 열심히 살면 이루지 못할 게 없었어요. 우리 모두에게는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이 있다는 걸 남편을 만나고 자식들을 키우며 알게 됐죠.”

가족은 함께 있어야 한다는 철칙, 고심 끝에 떠난 캐나다행
아이들을 외국에서 교육시키는 게 어떻겠냐고 말을 꺼낸 것은 남편이었다. 혈연과 지연, 학연에 묶여 있는 한국사회의 고질적 모순에 아이들이 재능을 펼치는 데 한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건설 쪽 일을 하며 일년에 반 이상 해외 출장을 다니며 보아온 선진국의 교육 시스템도 그런 생각에 한몫을 했다.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곳에서 합리적인 교육을 받기 위해 아이들을 외국에서 키웠으면 좋겠다고 남편이 먼저 얘기를 했어요. 미용사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상태에서 한국에서 미용으로 성공하고 싶었던 전 반대했죠. 남편이 ‘당신이 아무리 크게 성공해도 아이들이 당신 어깨의 별이 되는 것보다 값진 것이겠소’라고 절 설득하더라고요.”

1 세 살 무렵의 타블로. 2 미국으로 떠나기 전 올림픽공원에서 촬영한 가족사진. 3 캐나다에서 3남매. 4 발리 가족 여행. 5 큰아들과 브라운 대학에서.

마침 인도네시아로 가게 된 남편이 가족 모두가 함께 가자고 제안을 했고 복잡한 마음에 김 원장은 미용실을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당시 패션의 중심지 명동에 미용실을 개업했을 때였다. 남편을 따라가라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무엇이 아쉬워 해외에 나가 고생을 하나’라는 반응이었다.

“남편의 철칙 중 하나가 자식들이 어렸을 때 절대적으로 외롭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굶어죽지 않는 한 같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잦은 출장으로 가족과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았죠.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해주지 못하는 것에 미안해하다 더 이상 가족을 외롭게 하지 못하겠다며 함께 인도네시아로 가자고 하더군요. 저도 그동안 무리해서 일하며 몸이 많이 약해진 상태였고 아버지와 많은 시간 떨어져 있었던 아이들에게 빚을 갚는 의미로 함께 떠나기로 했어요.”

큰아들과 둘째 딸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이었고, 막내 타블로가 막 태어났을 때였다. 남편의 건강 악화로 2년 만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어린 시절 해외에서 보낸 경험은 큰아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싶다는 큰아들의 바람에 온 가족이 다시 한번 짐을 싼 건 1988년 88올림픽 직전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간 큰아이가 유학을 가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인도네시아에 있었을 때 영어를 좀 했는데 영어 공부에 대한 갈증이 있었나 봐요. 절대로 혼자는 보낼 수 없다는 남편의 불호령이 떨어졌죠. 당시에는 아이를 혼자 쉽게 유학을 보낼 수 있는 환경도 아니었고 저 역시 엄두를 못 냈어요.”

장남이니만큼 한국에서 열심히 공부해 자리를 잡은 후에 외국에 나가도 되지 않겠냐는 김 원장의 설득에도 큰 아들은 유학의 뜻을 굽히지 않았고 그렇게 어영부영 시간만 흘러갔다. 결국 데이브가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야 가족은 고심 끝에 캐나다로 떠나게 됐다. 이 역시 가족은 함께 있어야 한다는 남편의 신념에 따른 것이었다. 그동안 모아놓은 돈으로 아이들 학비를 마련하고 남편은 오랫동안 몸담았던 회사를 그만두고 캐나다에서 개인사업을 시작했다.

“어중간한 시기에 유학을 시작해서 큰아들이 고생이 많았어요. 한국인이 거의 없는 사립고등학교 기숙사에서 지내며 주말에만 가족을 볼 수 있었으니 많이 외로워했죠. 아이를 외롭게 두지 않기 위해 가족 전체가 캐나다까지 왔는데도 힘들어하는 아들을 보며 저도 많이 울었어요. 그래도 본인의 목표가 있으니까 그 시간을 잘 참고 이겨냈어요.”

브라운대 경제학과를 나와 컬럼비아대학원에서 국제경제학을 공부하고 월스트리트에서 증권 트레이더로 7년 넘게 일한 큰아들은 좋은 대학에 진학해 제대로 된 직업을 갖기까지 모범적인 틀 안에 충실했다. 첫째와 둘째가 힘든 과정을 거친 데 비해 학창 시절을 외국에서 시작한 타블로는 더욱 다양한 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자유롭게 자랄 수 있었다.

신중하고 합리적인 첫째와 둘째,
엄마를 닮아 예민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타블로
어렸을 때부터 타블로는 엄마를 잘 도와주는 가정적인 아이였다. 엄마와 함께 음식 만드는 걸 좋아해 과자를 구울 때도 한 손에는 항상 책이 들려 있었다. 김 원장이 어린 시절 막내아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책으로 얼굴을 덮고 잠들어 있는 모습이 떠오를 정도로 타블로는 책을 좋아했다.

“큰아들이 대학을 결정할 무렵 아이들을 데리고 스쿨 투어를 떠났어요. 미국 동부와 서부를 돌면서 여러 학교를 둘러봤는데 스탠퍼드대학교 교정에서 철없이 뛰어놀던 막내에게 ‘장차 네가 올 학교야’라고 얘기해줬죠. 그때 뭘 알았는지 막내도 ‘엄마, 나 이 학교 꼭 올게요’라고 대답했던 게 기억나네요. 교정에서 아이들이 꿈을 이룰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게 엊그제 같아요.”

김 원장은 둘째 딸 선주씨가 코넬대에 입학했을 때 “아들을 코넬대에 보내려고 유치원부터 준비했다”는 어느 미국인 학부형이 했던 말을 지금도 기억한다. 코넬대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둘째 딸은 국내 법학대학원을 졸업 후 미국 로스쿨을 거치지 않고 미국 변호사 시험에 합격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미국 변호사 시험 응시자격은 원칙적으로 미국변호사시험위원회(ABA: American Bar Association)가 인정하는 로스쿨(Law School: 법학대학원) 졸업자와 주별로 ABA 인증 교과과정을 운영하는 로스쿨 졸업생들에게 주어진다. 미국 로스쿨을 졸업하지 않고 곧바로 미국 변호사 시험을 통과한 것은 영국과 독일의 일부 대학 출신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으며 아시아에서는 최초였다. 변호사 시험 합격 후 선주씨는 외교통상부에서 1년, 미연방법원에서 1년 동안 일하다 지금은 미국 로펌 ‘폴 헤이스팅스’에서 일하고 있다. 미국에서 치과의사와 결혼해 조만간 엄마가 될 준비를 하고 있는 딸을 위해 김 원장은 얼마 전 태어날 아기 이름을 지어 보내줬다. 심성이 착해 언제나 엄마를 위로하고 격려해주던 딸이 엄마가 된다고 생각하니 대견스럽고 가슴이 뭉클하다.

문학뿐만 아니라 영화, 미술, 음악에 소질이 많은 타블로까지, 공부 잘하고 다재다능한 아이들을 키우며 엄마 아빠가 얼마나 신났을까 부러움의 시선을 보내는 사람이 많을 만하다. 하지만 항상 좋은 날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맨 처음 이민 갔을 때 남편이 캐나다에서 건축업을 하며 고생을 참 많이 했어요. 본인이 원하기는 했지만 엄격한 규율의 기숙사 생활을 하며 힘든 시간을 보낸 큰아들을 보며 울기도 많이 울고, 오빠 때문에 이민을 와서 낯선 환경에 적응해야 했던 둘째 딸도 맘고생이 많았죠. 형과 누나에 비해 자유로웠던 타블로는 또 자유로운 만큼 자기 안에서 생각과 갈등이 많았어요.”

겉으로 보기엔 남부러울 것 없는 최고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타블로지만 예민하고 풍부한 감수성 탓에 외로움도 많았고 혼란의 시기도 거쳐왔다. 타블로는 얼마 전 스탠퍼드대 재학 당시 뉴욕과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등지에서 쓴 글을 엮어 만든 소설집 「당신의 조각들」을 펴내며 “글쓰기는 혼란스럽던 현실에 대한 탈출구였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큰아들과 둘째 딸은 아빠 성격을 많이 닮았어요.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신중해요. 남편이 얼마나 신중하냐 하면 제가 ‘돌다리를 두들겨보고도 건너지 않을 사람’이라고 할 정도예요. 막내아들은 저를 많이 닮아서 다혈질에 감수성이 풍부하고요.”

6 스탠퍼드대에서 연극 감독을 하던 시절의 타블로. 7 스탠퍼드대 졸업식에서 엄마와 함께. 8 고등학교 때 졸업 최우수상을 받으며. 9 Youth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을 담당했던 타블로. 10 스탠퍼드대에서 타블로의 고등학교 은사님과 함께.

자식교육을 위해 이민까지 가서 갖은 고생을 다 했지만 그래도 지금 각자의 길에서 잘 헤쳐 나가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대견하고 감사하다. 아이들이 자신에게 심어준 아름답고 값진 추억들, 함께 행복했던 시간만으로 충분히 그 빚을 받았다고 김 원장은 생각한다.

아버지께 속죄하는 마음으로 써온 글,
지난 가을 「창조문예」에 등단
종종 방송에서 밝혔듯이 타블로가 가수 데뷔 당시 부부의 반대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특히 아들이 법대에 진학하기를 원했던 남편의 실망은 말할 수 없이 컸다. 미용실을 하며 누구보다 연예인들의 생리를 잘 알고 있었던 김 원장 역시 아들의 결정을 마냥 반길 수만은 없었다. “발만 삐끗하면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는 게 연예계”라는 말로 아들의 마음을 돌려보려고도 했지만 아들이 진심으로 하고 싶어 하는 일을 막을 수는 없었다.

“물론 저희도 자식들에게 바라는 게 있었죠. 왜 없었겠어요. 완고한 남편에 비해 저는 굉장히 자유로운 여자였어요. 제 아버지가 저에게 자유로운 삶을 살길 원하셨기에 저 역시 타블로가 가진 기질을 200% 표현하며 살길 바랐어요.”

전남의 작은 섬 거금도에서 태어난 김 원장은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도 아버지가 자신에게 베풀어준 사랑으로 그 누구보다 풍요로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 문학청년이셨던 아버지가 위로 오빠 다섯을 두고 11형제 중 여섯째로 태어난 그녀를 위해 지어주신 시는 그녀 인생의 첫 번째 선물이었다.

“국화 국(菊)자에 사랑 애(愛)자의 이름과 함께 ‘일백 꽃이 필 때 너는 피지 않다가 네가 만약 피려 하니 일만 꽃이 다 죽더라’라는 시를 지어주셨어요. 제가 생각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예요.”

지금도 아버지를 떠올리면 항상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딸이 문학가가 되기 원하셨던 아버지 역시 그녀가 미용 일을 시작할 때 반대를 많이 하셨다.

“웬만큼 반대하셨던 게 아니라 정말 심하게 반대하셨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 문학은 정말 춥고 배고픈 일이었거든요. 아버지께서 항상 저에게 하셨던 말씀이 ‘비록 가난하고 힘들지만 넌 귀한 사람이다’예요. 그 처절한 가난에서 아버지가 제게 주셨던 사랑은 정말 차고 넘치는 것이었죠. 그렇게 반대하시던 미용 일을 시작하고 아버지께 속죄하는 마음으로 틈틈이 글을 써왔어요. 미용은 물로 씻고 나면 지워지고 없어지지만 글은 영원히 남는 거잖아요.”

그렇게 틈틈이 쓴 글 중 ‘참으로 아름다운 것은’과 ‘아름다운 동반자’라는 작품으로 지난 가을 「창조문예」에 등단까지 했다. 타블로가 이런 자신과 닮았다는 것을 알기에 10가지 중 9가지 남편 편을 들던 그녀는 아들 편에 서서 남편을 설득했다.

“남편한테 ‘여보, 이런 명문대학 나와서 설마 굶어죽겠어요’라고 했어요. 제 아버지도 저에게 꼭 돈 잘 벌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을 가지라고 말씀하지 않으셨거든요. 공부했던 것과 전혀 다른 일을 하더라도 경험은 다 재산이에요.”

여리고 눈물이 많아 과연 이 아이가 연예인을 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됐지만 위기를 만났을 땐 누구보다 강한 아들이다. 무엇보다 영혼이 깊고 따뜻한 막내아들을 믿기에 아들이 하는 일에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는 그녀는 타블로와 스탠퍼드대학원 졸업식 때 있었던 일화를 소개했다.

“타블로가 대학원 졸업할 때 남편이 몸이 아파서 저 혼자 비행기를 타고 갔어요. 그때 워낙 급하게 가느라 한국 돈 10만원 정도와 공항에서 신용카드를 만들어 갔는데 공항에 도착해보니 카드가 안 되는 거예요. 10불도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아이 졸업식을 치르나 눈앞이 막막했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타블로가 제 어깨를 툭툭 치더니 ‘엄마, 지금부터 돈 없이 졸업식 치르고 5일 동안 살기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거야’라고 하더라고요.”

두 사람은 일단 중국집에 가서 제일 싼 음식을 시켜 둘이 나눠 먹었다. 그림을 좋아하는 아들을 위해서 오픈된 무료 미술관을 찾았고 서점에 가서 하루 종일 책을 봤다. 졸업식 때 꽃은 교회에 장식돼 있던 꽃을 잠시 빌렸고 엄마가 평소 존경하던 마틴루터 킹을 자주 인용해왔던 것을 생각해 타블로가 마틴루터 킹 동상 앞에 함께 가 사진도 찍어줬다.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타블로와의 추억이다.

“3년 반 동안 미국에 있던 아이의 짐이 바지 하나, 양말 두 켤레, 책 한 상자였어요. 졸업식 때 입었던 석사복을 넣을 가방이 없어서 공항에서 ‘가방 하나를 사자’고 했다가 얼마나 혼났는지 몰라요.”

타블로는 ‘엄마가 나의 미래 와이프상’이라며 엄마 같은 아내를 만나고 싶다는 말로 가슴을 설레게 하기도 했다. “엄마는 언제나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 편에 서 있었고 항상 아버지와 함께해줬어요”라는 말도 덧붙여서 말이다.

“제 자식이지만 제가 배울 게 많아요. 그렇게 듬직하고 따뜻할 수가 없어요. 그 누구보다 아들과 아들의 선택을 믿습니다.”

준비 없는 조기유학은 아이 가슴에 불을 품게 하는 것
자식 셋을 모두 미국에서 졸업시킨 학부모로서 조기유학을 바라보는 김 원장의 시각은 매우 회의적이다. 무엇보다 아이가 어린 시절을 가족과 떨어져 보낸다는 것이 가장 우려되는 부분이다.

“요즘 어머니들은 정말 용감한 것 같아요. 요즘에야 예전만큼 해외여행이나 유학이 힘든 시절이 아니지만 그래도 아이를 부모 곁에서 떠나보내게 되면 아이가 가슴에 불을 품고 사는 것과 다름없어요. 아이들에게 부모가 제일 필요한 때가 사춘기 시절이에요. 그때는 자식이 아무리 부모 애를 먹여도 부모와 자식은 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이와 함께할 수 있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부모 욕심으로 아이들의 환경과 미래를 설정하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부부가 함께 있어도 열심히 노력해야 가정을 잘 지킬 수 있습니다. 저도 남편의 일 때문에 자주 떨어져 있어봤기에 잘 아는데 엄마가 아이들 데리고 조기유학을 떠나거나 아이 혼자 유학을 보내는 것은 정말 말리고 싶어요. 그렇게 해서 영어 잘하고 크게 성공해도 가족이 주는 안정과 중심을 잃어버리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저희가 한국에서 누리던 물질적인 풍요를 다 접고 아이의 뜻에 따라 미국으로 떠난 건 가족은 함께 있어야 한다는 부부의 신념 때문이었어요.”

조기유학의 성공률은 30% 정도라고 본다. 나머지 70%는 실패, 그것도 아이와 가족에게 아주 치명적인 상처를 남길 가능성이 크다는 게 경험자로서 김 원장의 조언이다. 낯선 환경과 인종차별에 시달려야 했던 아이들의 유학생활에서 자신과 남편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다.
“아이들은 순수하기 때문에 유혹을 순진하게 받아들여요. 천장에서 기름이 떨어져도 그것 때문에 불이 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못한 채 아름답게만 보는 게 아이들의 눈이에요. 그런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아이를 공부시키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정말 가정의 철학이 확고하게 뒷받침되어 있고 부모와 자식 간에 믿음이 있다면 걱정할 것 없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에요.”

한국에서 성적이 떨어지거나 해외에 가면 무언가 더 좋은 것이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에 유학을 가는 건 더더욱 위험하다. 아이를 유학 보냈을 때 드는 경제적·심리적 비용과 부담, 아이가 느낄 외로움까지 부부가 머리를 맞대고 치밀하게 계산한 후에 그 노력을 한국에서 활용할 방법을 찾는 것이 우선이다. 외국에 보내려면 3~5년은 철저히 준비하고 실질적인 준비 외에 아이가 자신을 관리할 수 있는 주관과 능력을 심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만약 어쩔 수 없이 아이를 혼자 보내야 하는 상황이라면 줄기차게 연락하고 편지를 쓰세요. 저희도 큰아들이 기숙사에 있을 때 주말마다 데리러 갔고 격려차 자주 얼굴을 보였어요. 아이가 학교에 다녀왔을 때 엄마가 금방 와서 편지를 써놓고 간 것처럼 해야 아이가 외로워하지 않고 중심을 잡을 수 있어요. 타국에서 혼자 느끼는 외로움은 겪어보지 않으면 몰라요. 아이에게서 가족과 함께할 추억을 빼앗지 마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그녀라고 왜 자식들에게 서운한 점이 없겠는가. 훌륭하게 자란 세 아이들이 있지만 지난날의 희생과 아픔을 생각하면 작은 위로라도 받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때마다 아이들이 준 추억과 기억들, 그리고 아이들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소홀했던 시간들을 돌이켜 생각해본다. 나머지 삶은 반성하는 마음으로 자신과 남편에게,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 하나님께 최선을 다해 살고 싶은 마음이다.

서울시 강남구 도곡동에서 압구정동으로 다시 자리를 옮긴 ‘김국애의 헤어포엠’은 지금 공사가 한창이다. 페인트 대신 산소가 풍부한 점토와 백토를 이용해 친환경적 공간으로 새 단장을 하며 그녀 역시 새롭게 시작하는 기분이란다. 얼마 전에는 직원들과 함께 고향 거금도에서 3일 동안 미용봉사도 하고 돌아왔다. 자폐아 가족들과 수련회에 참가하며 지금까지 자신이 받은 행운과 축복을 이제 다른 이들에게 돌려줘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혹자는 자식들을 위해 그녀의 삶을 희생했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녀는 누구보다 충실히, 그리고 최선을 다해 삶을 일군 아름다운 어머니다.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이주석


출처 : 인터넷 경향신문
http://backend.khan.co.kr/MagzMang/lady/khlady_preview.html?mode=view&artid=200909041113231&code=5

Posted by poise